멍하이 일기 20 - 위조(萎凋 찻잎 시들리기)

 

차산에서 채엽해 온 찻잎은 가공하는 초제소에 도착하면 바로 넓은 돗자리 등에 펼쳐서 널어줍니다. 차나무에서 찻잎이 분리되는 순간부터 일단 찻잎은 변화가 시작됩니다. 더 이상 뿌리에서 수분이 공급되지 않으므로 쉽게 말해서 말라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채엽하다보면 먼저 채엽한 찻잎은 광주리 아래에 짓눌려 열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좁은 공간에 갇혀 있거나 눌려 있으면 더욱 많은 열이 발생하여 점점 색깔이 검은색 계통으로 변하여 맛과 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차농들은 한두 시간 채엽을 하고는 차밭 사이사이 원두막처럼 지어놓은 공간에 수시로 찻잎을 부려놓고 다시 채엽을 하곤 합니다.

 

이곳은 갑자기 비가 오면 대피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점심 등 간단한 식사를 해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도 차산을 오르다보면 종종 스콜성 소낙비를 만나곤 하는데 그때마다 달려가서 피하곤 합니다. 허름한 오두막에서 흙냄새 맡으며 차산에 솟아지는 빗방울들을 감상하노라면 기분이 참 야릇합니다.

 

어릴 적 읽었던 단편소설 소나기생각도 나고 옛날 옛날의 그녀도? 그런데 채엽하던 할머니라도 한분 같이 있게 되면 참 난감합니다. 이거뭐 길 잃은 별도 아니고, 언덕 위의 하얀 집도 아니고..말도 안통하고, 할 말도 따로 없고, 서로 멀뚱히 하늘, 땅만 처다 보고 있다가 비 그치면 그냥 수그리고 나옵니다...비가 오면 채엽 작업은 바로 중단합니다.

 

물이 묻은 찻잎은 잘 마르지 않아서 자칫 가공도 하기 전에 부패하기 쉽고 비가 올 때는 가공하기도 어렵습니다. 위조의 목적은 가마솥에서 살청을 하기 전에 찻잎의 수분을 줄여주고 차맛을 부드럽게 하는데 있습니다. 시들리기 시간은 보통 두세시간 정도인데 오운산은 최소 여섯시간 이상 하고 있습니다. 홍차나 백차의 경우는 더욱 길게 하는데 보이차는 제작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비교적 자유롭게 위조나 살청 시간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 위조 시간을 길게 하면 쓰고 떫은맛이 줄어들고 부드럽고 단맛이 좋아서 그해에 만들어 그해에 먹기에도 좋은 차가 됩니다.

 

저희 오운산의 경영이념인 당년호차(當年好茶)의 이념에 맞게 제작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경년신차(經年新茶) 즉 세월이 흐르면 매년 새로운 맛으로 다시 태어나는 차! 오운산이 추구하는 보이차가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차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자라고 그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변한 것은 사람들이겠지요! 가장 큰 변화는 바빠졌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비하여 위조도 살청도 쇄청도 모두 너무 빨리 끝낸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술의 발달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오운산은 보이차의 옛맛을 최대한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들리기를 하고 있는 찻잎을 한웅큼 움켜쥐고 향을 맡으면 상큼한 풀 비린내가 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단내가 올라옵니다.

 

여섯시간 이상 시들리기를 하자면 오후 늦게 들어온 찻잎은 밤늦게 살청을 시작하게 되는데 찻잎이 많이 들어온 날은 새벽까지 살청이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모차 생산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좋은 원료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가공 방법도 중요합니다. 요즈음처럼 한창 찻잎이 생산될 땐 자칫 가공이 소월해지기 쉽습니다. 어떤 차농은 아예 위조를 하지 않고 바로 살청 작업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수차에서 다소 자극적인 쓴맛과 떫은맛이 드러나면 위조 시간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차 생산 과정에서 시들리기는 다소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진정한 명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것 한 가지라도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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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설자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들리기가 이렇게 중요한지 미처 몰랐습니다.
    당년의 차가 맛있고 묵은 차가 해마다 다른 맛을 낸다...귀한 차의 목표입니다. ^^

    2018.01.15 14:1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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